근원적인 追憶을 되새기면서: 金明喜

최월희 교수 2012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는 詩的인 이미지를 “한 순간에 지성과 감성이 함께 일으키는 복합물” 이라고 定義했다.  金明喜의 작품은 바로 그런 시적인 힘, 즉 시적인 인식이 일어나는 순간을 가져다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오래된 전날 자기가 겪은 어떤 일이거나, 어떤 歷史的인 사실이거나, 또는 옛날 옛적 古 事거나 간에, 과거를 잔 물결처럼 인식하게 하는 그런 힘을 말이다.  어느 관객 은 그것이 요술처럼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 가는 화가의 창조적인 환상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작가의 화가적인 구성-“지성과 감성의 복합물” ? 을 미처 관찰하 지 못 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구성의 환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과 “지금이 아닌 때”를 동시에 보게 하는, 대상을 넘어선 새로운 수평선으로 향하게 한다.  그 새로 떠오른 수평선은 관객의 심상치 않은 경험이 된다.  그렇다면 보는 이의 과제는 이 작가가 그런 시각적 현상을 일으키는 형상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추측해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어느 작품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강화시 키는지 아니면 지워 없애 버리는지, 또는 보는 사람을 어떻게 보통 시간의 흐름 밖으로 옮겨 가게 하는지를 관찰한다면, 이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시각적 형상 을 창조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으며 따라서 그 작품에 대한 이해 범위도 넓혀질 것 같다.

우선 김명희가 그리는 대상이 얼마나 平常的인가부터 살펴 보자.  그의 작품 에 등장하는 것 가운데 별나게 고상하거나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우 리에게 친근한 사물일 뿐만 아니라 흔하고 낯 익은 대상들이기도 하다.  공부하 는 아이, 노는 아이의 초상, 나날의 일과를 돌보고 있는 여성, 환한 색깔로 만발 한 꽃 가지, 동네로 흐르는 개천, 한 뼘의 들 밭, 어느 것이든 다 보통 일어나는 일상 생활의 그림이다.  놀라운 것은 작품의 주제가 무엇이든, 너무나 평범한 인 물 또는 풍경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그 인물이나 그 풍경에 대한 결단코 평범 하지 않은 상당한 이해가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소박하기만 한 事物이 우선 미세한 세부까지 남김 없이 섬세하게 처리하는 이 화가의 솜씨와 정성에 의해서, 또 더욱 근본적으로 화가의 비전이 빚어 내는 그 특유의 각도로 인해, 짙은 세련미를 지닌 형상으로 변형된다.

세부를 표현하는 그 특유의 테크닉과 김명희 특유의 화가적 비전이 지닌 각 도가 가져오는 결과는 바로 평범하게 살아 가는 보통 인간과 자연 안에 우주적 인 인간을 동시에 드러내 주는 그림을 낳게 하는 듯 하.  다시 말하자면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이는 사물의 섬세한 세부가 화가적인 비전다의 특정된 각 도에서 구성되었으며, 자연 속에 처해 있는 한 생물로서의 인간, 계급이나 남녀 관계나 역사 등등의 군 때 묻은 사회적인 존재가 아닌 자연인을 보는 각도 역시 이 작가의 비전의 일부라고 하겠다.  세부야말로 그런 유형에 매인 형상의 한계 를 밀어 내는 방법이다.  세부표현에 집중하는 김명희의 변증법은 보이는 것의 안으로 들어가 근본적인 과거를 찾으려 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류와 그 주거환 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한다.  한 없이 상세하게 그려지는 세부를 통해 평범한 얼굴, 흔히 보는 풍경 또는 속된 전설이 변형된다.  이 화가는 작품 작성과정 한 단계 한 단계에서 표현화가 구상화와 어떻게 다른 가를 잘 증명해 준다.  김명희의 그림은 실존하는 형상이나 모양을 구상화시키 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과 모양을 초월한 실존을 표현해 준다.  이 작가의 포용 력 넘치는 세부 표현은 통합된 기억 속에 박혀 있는 본질적인 추억을 통하여 그 것이 얼굴이든, 풍경이든, 그 대상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展望이 가능한 느 낌을 안겨 준다.

이 화가의 표정이 풍부한 초상화의 우아한 눈길은, 예컨대, 욕망, 욕심, 야망 에 찬 인물들의 눈빛이 아니며, 그렇다고 고뇌 같은 것을 겪은 인물의 표정도 아 니다.  수 백 만년의 생존 경쟁 끝에 進化되고 蒸溜된 보통 인간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눈길이다.  人類 共有의 기억을 통하여 淨濟되었고 누그러지고 순수 하면서도 동시에 博識하게 된 어떤 추상적인 실존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 각 세계 안에서 화가의 충만한 표현력이 무의식적인 우리의 思考의 前提를 형 성하게 해준다.  김명희의 그림에서 결별과 합병이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낮인가 하면 밤이며, 어둠에서 광선이 나타나고 어둠이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칠판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쳐 나오는 지식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렇게 보 화가가 캔버스 대신 사용하는 칠판의 어두운 자질 자체에 대단히 상징적인 의 미가면 (알려져 있지 않은, 묻혀 있는, 해석이 필요한… 한 마디로 “생소한 他” 라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은 화가의 그림에서 상징적인 것 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은 실제로 빛을 어둠 속으로 이끌어 오는 과정 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가 환하게 비추어 보이게 만든 어둠을 표현 하고 있다.  어둠으로 표현된 낮이라고나 할까.  김명희의 그림에는 실제의 他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他, 꿈속에서 만들어진 온갖 것을 통해, 그리고 인간 공동의식을 통해, 객관화된 他도 들어 있다.

밤의 현실이, 우리 인생의 반을 차지하고 그러므로 우리와 친근해야 하지만 너무나 알 수 없고 신비롭기만 한 밤이, 김명희의 화가적 세계의 작업소재를 이 룬다. 그녀는 전통적인 캔버스의 백색을 물리치고, 안 보이는, 아직 대결하지 못 한, 어둠을 택한다.  역사, 교실, 어린이, 교육, 사회 등등 칠판의 본래 의미를 제 쳐 놓는다면 칠판은 빛 속에 비추어 무엇을 본다는 상식적인 개념을 뒤엎는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을’ 낮보다는 밤을, 깨어 있는 세상이 아니라 꿈속 의 세상, 분석이 아니라 상상을, 택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화가는 보통 사물 ? 사실적인, 구체적인 ? 을 통하여 상당히 상승된 상태의 공간, 비옥한, 공동의 추억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당도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숨겨진 것과 잠재의식 의 어둠 속에 눌려 있던 것이 상호 작용을 갖게 하며 그 결과 마침내 숨겨져 있 던 모든 것을 표면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김명희의 그림은 실물 을 흉내 내거나, 거울처럼 반영함으로써 이루어진 묘사가 아니다.  그의 그림이 긁어 올려 내는 것은 무엇의 생김새가 아니다.  사람의 기억에도 없을 만큼 오래 전 태고로부터 내려 오는 우리 인류 역사의 기록을 오밤중에 출현시킨 환상이 다.  물론 그것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상이며 아직 찾아내지 못한 어 떤 공간으로 불려가서 겪는 환상이기도 하다.  보는 이 여기서 他界의 현실로 들 어 가기 직전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극히 가까운 주변에서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평범한 사물이 그 타계의 현실 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그 다른 현실이 사실은 멀리 있는 것도,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주위의 사물 안에 벌써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김 명희는 관객에게 보여 주고 있다.  사실, 고운 망사를 통해 보는 것 같은 체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의식의 한계를 어렴풋이라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가 보여 주 는 것은 근본적인 진리다.  예술의 眞價는 평범한 것에서 이탈된 것이 아니라 오 히려 평범한 것, 또는 일상의 현실에서 보이는 평범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아무데서나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물이 分解 직전이 될 정도로 면밀하게 그려진 결과 보는 이가 보통이 아닌 모양으로 보게 되는, 얽매임이라고는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매체이기도 하다.

김명희는 문자 그대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사물의 매우 미세한 세부가 불 빛을 받아가며 모양을 형성하면서 부각되게 만들 칠판의 배경으로부터 영상이 떠 오르게 한다.  최초로 어둠을 사용하여 극도로 사실어적인 畵像을 自體發光 하도록 만든 화가는 카라바지오 Caravaggio 일 것 같다.  김명희는 카라바지오의 방법뿐만 아니라 렘브란트Rembrandt 나 베르미에르Vermeer등등 다른 고전화가 들의 기법도 도입한 것 같다. 극도로 섬세한 偏差로 표현된 明暗이 이루는 어둠 속에 그림의 대상은 묻혀 있는데 그 대상에 조명을 집중시켜 환히 돋보이게 만 든다.  이 화가의 표면 바탕, 즉 검정색은 천지창조이전의 우주의 혼돈을 암시하 는 것도 같지만 빛, 그 화가적인 기술의 영혼인, 빛의 원조였던 존경스러운 옛 藝術史까지도 생각 나게 하는 것 같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처럼 김명희는 환상적인 배경 속에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진 보통인물을 제시한다는 처 리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 르네상스 후기 화가와는 달리 김명희의 그림은 그 인물 하나 하나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김명희는 인류의 據點 이 어디 있는지를 밝혀 내기 위해 기억에 쌓인 시간을 발굴하고자 한다.  같은 그림 안에 대치된 평범과 환상이 새로운 것을 찾아 낼 수 있는 공간을 전개하는 데 카라바지오의 경우 그것이 개개인물의 인격이요, 김명희의 경우 그것은 마 음속에 있는 이미지라고 하겠다.  발견에 도착하는 방법은 같다.  하지만 발견의 주제는 전혀 다르다.  카라바지오의 경우 속물들이 성인으로 변신하고 현실이 아닌 시각적 현실이 의식의 한계를 깨뜨리고 타계로 出帆한다.  김명희의 어둠 이 카라바지오의 적나라한 현실만큼이나 극적이고 확실하지만 그 영상은 세련 되지 않다거나 난폭한 경우가 없다.  부드럽고 신비스러운 표현을 택한 김명희 의 그림은 구성이나 내용을 난폭할 정도로 타락시키는 서양미술의 자연주의와 는 거리가 멀다.  강력한 浮彫와 광선이 김명희의 인물들에게 색 다른 종류의 현 실감을 줌으로서, 생긴 그대로의 신체이면서도 중대한 실존의 순간을 재현시키 도록 한다.

김명희의 극도로 사실화된 모습의 보편적 인물들처럼 詩的인 드라마는 동서 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창작 계통을 자유분방하게 택하여 연결하는 포스트모더 니즘 경향을 보이지만, 현재 서양식 미술에서 독특한 실천으로 생각되  “강제 유배” (2002, 830x120) 를 보면, 왼편에서 비추는 광선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완전 審美의 경험을 치르게 한다.  자작나무가 그루마다 따로따로 정확한 색깔 과 나무결한을 드러내면서 전면에 서있는 이 그림에서, 화려한 색깔의 전통한 복을 입은 여자애들은 타계에서 잠깐 현신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이렇게 반사 된 광선의 효과로 맨 앞에 있는 커다란 자작나무 몸통들이 마치 자체 발광이라 도 하는 것처럼 되어있고 그 빛이 수풀을 밝혀 주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애들의 얼굴에 떨어진 광선은 그들어의 유배 역사를 넘어서 차분한 인물들의 본질 자 체를 꿰뚫어 보이는 것도 같다.  또한 무늬 박힌 과거의 조명 받은 신령으로 살 아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김명희의 작품의 해석은 물론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까지도 사실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꿈을 고요하게 이해한다는 무드 속에서 일어나는 차이에 불과하다.   그림의 무드에 관객은 함께 도취하게 되는데 그림 과 관객 사이에 분열과 융합이 동시에 일어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사실적 으로 그린 형상이 정지되어 있으면서도 공중에 고요히 떠있기도 하고 아니면 나르기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관객과 작품이 결합되는 것을 느낀다.  김 명희는 과연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관객은 광선이 그녀의 수풀을 껌 벅껌벅 비추어 주는 가운데 혼란에 빠진 사람들, 온 인류. 또는 갈 곳 잃은 사람 들과 결합되어 이 그림의 靜寂한 무드에 닻 내리듯 머무르게 된다.

김명희의 이야기는, 이미 본 바대로, 세부가 상세히 그려진 보통 사람들의 모 습으로 시작된다.  앞에 내 놓은 아이, 여성, 노인, 또는 문화적 立地를 잃은 사람 들을 받쳐 주는 배경은 상상으로 꾸며진 어두운 꿈같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김 명희는 이러한 병치竝置 구성을 또 다른 對照로, 즉 과거/현재, 정지/율동, 지금/ 기억 등등으로 강화시킨다.  이 화가의 작품이 가진 불변의 요소는 정반대로 대 조되는 前面과 背景이다.  어둠에 대조되는 광선, 혼란에 대조되는 구조, 추상에 대조되는 형상이 항상 공존한다.  순수한 가능성이라는 현실주의와 함께 공존 하는 추상주의의 대조를 통해 새로운 착상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에 다리가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종류가 다른 두 가지 구조 원천에서 心的인 눈이 뜨여 새로운 공간으로 가게 되며 대상의 강화된 현 실성과 無構造를 함께 관찰할 수 있다.

때로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가지 광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서로 포개져 있는 경우도 있다.  “龍” (2007, 120x90)에서 거대한 공예품 항아리가 험한 풍랑 속에 놓여 있는 광경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그림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점은 이 공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풍랑에 휩쓸리고 있는 바다가 아니라 그 거대한  항아리라는 사실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Wallace Stevens가 “항아리의 逸話” Anecdote of the Jar라는 짧은 시에서 읊은 얘기가 생각 난다.  “테네시에 항아리 하나를 갖다 놓았다/ 언덕 위에 놓인 둥그런 항아리/ 그것이 아무렇게나 생긴 자 연을 시켜/ 언덕을 둘러싸게 만들었다.// 자연은 충실하게 따라 오르며/ 주위에 널리 퍼져 자연이기를 멈추고/ 항아리는 땅 위에 둥그렇게 놓인/ 키 크고 당당한 공중에 항구가 되어// 어디서나 당당히 군림했다./ 회색에 아무 장식도 없는 항 아리/ 새를 낳게 하지도 수풀을 만들지도 않는 항아리/ 테네시에 있는 어느 무엇 과도 닮지 않았다.”  하늘의 구름과 항아리의 구름이 합쳐 버리고 항아리에 그 려진 용이 꿈틀거리면서 바다 속으로 뛰어 들려는 모습을 보면 이 詩가 주는 영 상은 더욱 강력해진다.

화가는 때때로 심한 靜寂에 대치시켜 이미지의 한 구석에 동영상의 창을 삽 입한다.  이런 경우 동영상의 움직임이 물론 이미지에 이야기 거리를 주입시키 지만 그와 동시에 그림이 投影하는 美的인 현실을 덜 확고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면서 보는 이에게 사실은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그림 속의 형상이 매우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보는 자신이 다른 모 양으로 바꿀 여지가 전혀 없으므로, 배경이 열려 있는 구조라든가 또는 동영상 의 지속된 작동이 없었다면 보는 사람 화가 앞에서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었 을 수도 있겠다.  화가는 이처럼 포개는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관객의 시각적 한 계를 풀어 주고 의식의 한계를 함께 뛰어 넘을 수 있게 해준다.  그림의 전면에 위치한 사실적인 이미지로 관객을 순간적으로 사로잡은 뒤 또 다르게 있을지도 모르는 타계의 모습을 보도록 놓아 준다는 이 화법은 매우 강력한 테크닉이 아 닐 수 없다.

이 화가의 對置 스타일이 떠 올리는 또 다른 현실은 지나간 어린 시절과 문화 적 혼돈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영적 바탕을 示唆하기도 한다.  한편 그 역사는 移住와  世界化와 테크놀로지의 영향을 받았으니 ? 결국은 21세기 인류의 공동 운명이라고도 하겠다. 혼돈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화가 자신의 경력에서 - 미국 뉴욕과 한국 내평리에 나눠 살아 온지 오래되어 두 군데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 한다는 사실 -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혼돈감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이 사실은 좀 더 폭 넓고 좀 더 개념적으로 성공적일 때, 관객이 세계화된 문화시민으로서 東과 西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의 문턱에 설 수 있게 해 준다.  소속감이 이제는 어느 쪽에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물론 아직은 東西 어느 쪽도 우리에게 맞는 세계일 수 없다.  현대생활 상태 자체가 혼돈이라는 얘기 줄 거리로 보면, 김명희의 “환영”은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공간과 시간 가운 데 감지될 수 있는 특정한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한가지 한 가지 사물로서 존재 한다.  하지만 그 정신적인 자주성이 이 그림들을 끌어 올려 예술의 이상적인 영 역에 자리 잡게 한다.  김명희는 자신의 작가적 의식을 동원하여 우리의 잠재의 식 속을 파헤침으로써 영원한 인간성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의식할 수 있는 것 以前(현재가 아닌 때)의 공간/시간을 가져다가 현재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준다.

그의 그림이 되돌려 가져 온 것들은 자라는 아이의 정신에 박혀 있는 장래의 추억일 수도 있는가 하면, 김홍도의 ‘神仙圖’ 에서 찾아 낼 수 있는 추억일 수도 있으며, “Liu Guandao” 의 “Whiling Away in the Summer” 처럼 취기 가득한 추억 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저장된 기억에 대조가 되는 想像으로 만들어진 추 억이라는 얘기다.

르네상스 후기 거장들처럼 김명희의 작품은 한 없이 풍부한 빛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인물과 몸짓의 우아한 표현력을 보게 한다.  개개의 특징을 묘사 하는 선을 넘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을, 즉 만인공통 다의 兒童性, 한 여인 또는 나이 든 남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만인공통의 人生苦를, 묘사해 우리에 게 알려 주는 일을 그들 작품이 한결같이 해 낸다.  김명희가 보는 현실은 르네 상스 거장들의 것처럼 환상적인 것과 섞여 있다. 다만 라파엘이 “Saint George and Dragon” 에서 광활한 Umbria의 풍경 안에 요술세계의 용 싸움을 그린 반면 에 김명희는 항아리에 그려진 용이 현세적인 바다에 군림하도록 설정했다.

김 재희 번역

3/24/12